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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일전 우리동네 어느 할아버지 한분이 돌아가셨습니다. 

28년생, 올해로 여든셋, 연세는 좀 많았지만
굳이 고령화 사회를 들먹이지 않아도
얼굴에 잔주름 가득한
동네 골목 어디쯤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우리동네 할아버지입니다.

독립운동을 했던 형님을 위해 만주까지 오갔던 어린시절
전쟁통에 인민군으로 총을 들어야했던 청년시절
인생의 4분의 1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시간들에도 불구하고
언제든 마주치는 다른 동네어르신들과 하나도 다름없이
그는 그저 우리동네 평범한 할아버지입니다.

목구멍에 고름이 차, 생명마저 위험했던 날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주변의 권유로 죽어도 쓰기 싫었던 종이한장을 쓰고
남은 평생 가슴에 한을 지고 살아간 할아버지
그래도 늘 낚시 즐기며 잠시도 쉬지않고 동네를 누비는
그는 우리동네 낚시 좋아하는 할아버지입니다.

굳이 조금 특별한 점을 찾는 다면
지금은 갈 수 없는 고향땅에 다시 가고 싶어했다는 것
당신같은 이가 다시 없도록, 분단된 이땅이 다시 하나되기 위한 일이라면
젊은이들 무색하게 어디든지 가장먼저 걸음하시던 것
고난하기만 했던 80인생에도 늘 밝은 모습이었던 것
일가친척하나 남지 않았지만 장례식장엔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

넋을 저승으로 떠나보낸다는 49일


며칠전 우연히 할아버지의 집앞을 지나며 다시금 그려봤네요.
이 평범한 우리동네 할아버지를 이제 보내드립니다.

고이잠드소서




고 이학천 선생님 약력

- 1928년 1월15일 평안북도 용천출생
-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위로 형님 둘, 누나하나, 아래로 남동생 하나 여동생 셋이 있음
- 어린시절 항일운동을 했던 큰 형님의 영향을 많이 받음, 큰 형님에게 자금을 전달하기 위해 만주까지
  오가기도 함.
- 1950년 전쟁당시 조선 인민군 6사단(사단장 방호성) 659연대 1대대 3중대 소속 막심중기전사로 참전
- 전쟁시기 8월 초순경, 진주를 지나 군복 어시제고개를 넘다가 미군의 매복전에 걸려 부대원 100여명
  몰살, 
당시 크게 부상당함
- 야전병원에서 치료도중 9월28일 전면 후퇴명령 받음
- 후퇴 중 부상부대원들은 본대와 떨어져 덕유산에서 빨치산 활동 시작
- 1952년 8월 부상으로 야전병원에서 치료 중 토벌대에 검거
- 당시 제네바 협정에 의해 포로교환이 되었어야 하나, 포로수용소가 아닌 교도소에서 재판을 통해
  유격대로
둔갑, 20년형 선고 받음.
- 이후 대전교도소 10년, 대구교도소 4년, 김천소년원 2년 옥살이 후 1968년 출소 (4.19당시 1/5 감형)
- 출소 후 목수 노동자로 생활, 절이나 고택을 지으며 72년 결혼, 아들 출생
- 1976년 사회안전법으로 다시 대구교도소에 구속됨.
- 박정희 정권의 감시망 속에서 가족들이 끊임없이 고초를 겪는 과정에서 이혼, 재 구속과 이혼으로
  가족들과
는 이후 연락두절
- 대구교도소에서 김천으로 이감된후 1980년 출소
- 2001년 2월6일 전향철회선언 후 2차 송환 요구
- 전향당시 축농증으로 입안에 고름이 차서 아무 음식도 먹지 못하게 되었으나 교도소측에서 비전향자
  라는 
이유로 치료를 해주지 않았다고 함. 이에 주변에서 일단 살아야 한다고 설득하여 전향서 작성
- 2010년 담도암 판정, 몇번의 수술과 치료를 받았으나 2010년 9월12일 오후 5시 34분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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