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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옛 선비들의 배움터, 도동서원
얼마전 두번의 포스팅을 통해 4대강 현장답사 이야기를 전해드렸는데요. 답사를 마무리하면서 4대강 줄기 가까이에 있는 도동서원에 들렀습니다. 놀러나온 걸음은 아니었지만 이왕 나선길이라 주변에 있는 좋은 곳이니 들러보자는 취지였는데요. 나름 참 좋더라구요. 오늘은 이 도동서원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우리나라 전국에 대략 680여개의 서원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참 많죠^^ 그런데 그중에서도 영주의 소수서원,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주의 옥산서원 그리고 대구의 도동서원을 일컬어 5대 서원으로 꼽는다고 합니다. 다섯 곳 모두 영남지방 즉 경상북도 지역에 있는 것이 특징인데요. 실제로 전국 서원의 3분의 1이 넘는 240여개나 되는 서원이 영남지방에 분포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지금의 영남지역이 조선시대 당시 사림, 유림이 유난히 발달했던 지역임을 보여주는 단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도동서원은 보시듯 낙동강가에 인접해 위치하고 있습니다. 제목에 넣었듯 마치 4대강중 하나인 낙동강을 살피기 참 좋은 위치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침 건너편에 한참 4대강 흙을 퍼나르고 있는 중이라 당시의 선비들이 이 모습을 봤다면 한바탕 불호령을 내렸을 것 같네요.
어쨌든 도동서원가기 전 언덕에서 내려다본 모습인데요. 참 아담하면서도 주변 산, 강과 잘 어우러진 느낌입니다.
입구에서본 도동서원의 모습입니다. 왼쪽에 자리잡은 커다란 나무가 인상적인데요. 아주 유명한 나무라고 하는 군요. 좀더 가까이 가볼까요.
언뜻보아도 수령이 상당해 보이는 은행나무입니다. 세월을 이기지 못해서인지 큰 가지 여러개를 콘크리트 기둥이 떠 받치고 있습니다. 마치 부축을 받고 서 있는 것 같은데요. 그래도 가지를 매운 잎사귀들은 여전히 파릇파릇 아름다운 빛깔로 살아있습니다.
표석을 보니 400년이 넘은 나무더군요.
키큰 어른이 팔을 둘러보아도 어림없을 만큼 가운데 나무 기둥은 아주 굵었습니다. 물론 왼쪽에 보시듯 훼손된 부분은 보강을 하기도 했습니다.
표석만이 아니라 요렇게 나무 앞에 안내문이 있었는데요. 이 나무를 이른바 김굉필나무라고 씌여져 있습니다. 도동서원이 사액을 받을때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심었다고 하는데요. 이 서원이 바로 김굉필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 김굉필 나무라고 한다고 합니다.
김굉필나무를 지나 도동서원으로 들어서기 전에 있는 안내판입니다. 이쯤에서 도동서원에 대한 공부를 좀 하고 갈까요. ^^.
도동서원
도동서원은 조선 5현의 첫머리(首賢)에 차지하는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선생의 도학을 계승하기 위하여, 퇴계 이황과 한강 정구 선생의 주도로 유림의 협조를 받아 세워졌다.
1607년 선조 대왕 40년에 도동서원으로 이름지은 현판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2년(1865) 흥선 대원군이 서원을 정리할 때에도 한훤당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문을 닫지 않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64년 선조 원년(1568)에 비슬산의 두 골짜기 물이 합쳐지는 당성군 유가면 쌍계리 초곡천 산기슭에 세운 쌍계서원(雙溪書院)이다. 선조 6년(1573) 임금이이 서원에 에 필요한 현판과 책을 하사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때 왜병의 방화로 불타고 말았다.
그 후 선조 38년(1605)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워 보로동서원(甫勞洞書院)이라 하였다 2년후 나라에서 공자의 도(道)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으로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이름지어 사액하여, 마을 이름도 도동리라 고쳐 불렀다.
선생은 전라도 순천시의 옥천 서원을 비롯한 전국 6도 15개 서원에서 향사(享祀)받았지만, 선생이 성장하시고 묘소를 모시고 있는 연고지의 도동 서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서원은 일인일사(一人一社)의 원칙으로 모두 문을 닫게 되었다. 1962년에 사당과 중정당 및 토담이 보물 350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토담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우면,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되었다.
도동서원은 조선 5현의 첫머리(首賢)에 차지하는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선생의 도학을 계승하기 위하여, 퇴계 이황과 한강 정구 선생의 주도로 유림의 협조를 받아 세워졌다.
1607년 선조 대왕 40년에 도동서원으로 이름지은 현판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2년(1865) 흥선 대원군이 서원을 정리할 때에도 한훤당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문을 닫지 않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64년 선조 원년(1568)에 비슬산의 두 골짜기 물이 합쳐지는 당성군 유가면 쌍계리 초곡천 산기슭에 세운 쌍계서원(雙溪書院)이다. 선조 6년(1573) 임금이이 서원에 에 필요한 현판과 책을 하사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때 왜병의 방화로 불타고 말았다.
그 후 선조 38년(1605)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워 보로동서원(甫勞洞書院)이라 하였다 2년후 나라에서 공자의 도(道)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으로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이름지어 사액하여, 마을 이름도 도동리라 고쳐 불렀다.
선생은 전라도 순천시의 옥천 서원을 비롯한 전국 6도 15개 서원에서 향사(享祀)받았지만, 선생이 성장하시고 묘소를 모시고 있는 연고지의 도동 서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서원은 일인일사(一人一社)의 원칙으로 모두 문을 닫게 되었다. 1962년에 사당과 중정당 및 토담이 보물 350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토담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우면,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되었다.
자 도동서원이 이런 곳입니다..하하.
그럼 이제 입장해 보실까요.
도동서원 정문에 해당하는 수월루입니다. 놓여진 돌계단이며 누각의 장식까지 화려하지는 않지만 웬지 정갈한 느낌입니다.
대문에는 붉은색으로 칠해진 위해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도동서원의 이름에도 있듯이 이 서원은 도학을 기리기 위해서 새워진 곳이라 그런지 그런 느낌을 주는 도형들이 꽤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이 문고리는 얼마나 오래 됐을까요. ^^.
안쪽에서 본 수월루입니다. 늘 그렇지만 잘 만들어진 선조들의 건축물들은 정말 조화롭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보는 것 만으로도 안정감을 주는 것 같습니다.
역시 옛건축물들은 요 각도가 가장 멋지다는..ㅎㅎ. 단청이 화려하진 않지만 참 차분한 느낌입니다.
입구의 수월루를 지나 도동서원 본당으로 들어가는 환주문입니다. 갓을 쓰고 고개를 숙여야 들어올 수 있도록 일부러 낮고 작게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선비들이 들어오면서부터 마음가짐을 가다듬을 수 있게 그리 한것이라고 합니다.
들어다 옆을 보니 담장이 참 멋스럽더군요. 나중에 찾아봤지만 일부러 엇갈리레 쌓는 등 나름 상당히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도동 서원이 전반적으로 작은 것 하나에도 정성을 많이 쏟아 만든 것 같습니다.
도동서원의 본당이라할 중정당의 모습입니다. 중정이라 함은 중용의 다른말로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실천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도동서원을 처음 지을때 주도했던 퇴계이황선생의 글씨로 새겨진 현판이 바깥쪽에 걸려있습니다.
중정당 한가운데 있는 이 도동서원 현판이 바로 선조가 내린 사액현판입니다. 물론 글씨는 선조가 쓴건 아니구요. 모정 배대유라는 분이 썼다고 하는군요.
이것은 도동원규라는 것으로 서원에서 생활하는 유생들이 어떻게 생활해야하며 어떤것을 지켜야 하는지 기록해 둔 것이라고 합니다.
마루바닥이 참 꼼꼼히 잘 짜여져 있더군요. 이곳에서 다들 둘러앉아 수업을 들었겠죠. ^^.
중정당 앞에 놓인 교단 같은 설치물인데요. 아마도 이곳에 서서 강연을 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이것은 중정당 정면 아래쪽 돌기단인데요. 서원이 비탈진 산세를 따라 지어져서 앞쪽을 이렇게 돌로 쌓아 튼튼히 받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단을 이루는 돌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하나도 같은 모양도 없고 각기 돌을 깍은 듯 보이는데 서로 맞물려 참 조밀하게 되어 있습니다. 보시면 대체로 6단으로 쌓여져있는데요 구성과 배치, 맞물린 의미 모두가 도학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대단하죠..^^.
기단 위쪽에 보면 이렇게 간격을 두고 돌출된 머리모양의 조각물이 있습니다. 이것을 사물잠이라고 하는데요. 바로 용의 머리모양입니다. 각기 물고기나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모양과 색깔이 조금 달랐는데요. 머리만 떼간 못된 이들이 있어서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용머리까지 떼갈 생각을 했을까요. 이해가 안되네요. 쩝..
중정당 마루 양옆 문살을 보시면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문 창호지가 바깥쪽에 발려져 있는 것입니다. 보통은 방쪽에 종이를 바르는데요. 강당이 방보다 더 중심이고 중요해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참 사려깊기도 하고 배우는 선비의 마음 가짐이 그랬구나 싶었습니다.
중정당앞 마당에는 이렇게 양쪽으로 건물들이 세워져 있는데요. 각각 거의재, 거인재라고 하는데요. 서원에 머무르던 유생들의 기숙사였다고 합니다. 당시 유생 정원이 대략 20~40정도였다고 하니까요. 조금은 복잡았을 듯 합니다. ^^. 지금은 관리하시는 분들의 쉼터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중정당 뒤로는 서원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사당으로 통하는 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관람객들에게 공개를 하지 않는지 잠겨져 있더군요. 웬지 못가게 막아놓으니 더 가고 싶더라는..그래도 문화유산이니 무리는 하지 않았답니다. 하하.
발걸음을 돌리며 중정당 처마를 보았는데요. 고운 단청 빛깔은 하나도 없는 소박하고 단촐한 처마였습니다. 아마도 유생들이 공부하는 시설이었던 것 만큼 그리 꾸미는데는 신경을 쓰지 않았을 듯 합니다.
요즘 어딜가나 학교도 많고 그보다 더많은 학원도 있어서 비교도 안되겠지만 당시에는 이렇게 서원에 들어가 배우는게 제대로 배우는 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의 대학이 이런 서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겠죠.
이렇게 오늘 둘러본 도동서원은 많이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조선시대 선비들, 유생들의 생활과 삶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아주 멋들어진 서원인데요. 당시엔 손가락안에 드는 유명 서원이었나 봅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바로 건너편에서 4대강 공사를 진행 중이라 찝찝한 구석도 있었지만 주말엔 이렇게 주변에 있는 옛 유적지를 찾아가보는 것도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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