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흔히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들 합니다. 어느 싯구에서 나온말이라는데 그와 별개로 최근들어 들리는 갖가지 사고 소식이 이런 말을 더 그럴듯하게도 하는 것 같습니다. 모쪼록 사고 희생자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가까운 우리의 현대사에서도 4월은 유독 아픔이 많은 달입니다. 

우선 대표적으로 4,19혁명 정도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은데요. 물론 역사적으로 추앙받고 있고 이승만 독재가 그로인해 무너졌던 만큼 아픈 역사라 할 수 없을런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수많은 학생들이 목숨을 던져 이뤄낸 혁명이었고 얼마지나지 않아 이어진 군사쿠테타와 이후 장기간의 군부독재가 숭고한 희생을 덧씌운 때문입니다. 
어쨌든 4월은 역사속에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달인것만큼은 확실할 것 같습니다.

며칠전 4월9일은 4월의 여러 역사적 순간 중 가장 잔인하고 억울한, 서글픈 죽음이 있었던 날입니다. 이젠 많이 알려지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보상이 이루어졌습니다만, 바로 4,9 인민혁명당 사건 희생자들이 사형당한 날이었습니다.

세대는 다르지만 희생자 중 한분이 저희 대학 선배라 학창시절 매년 이맘때면 추모제를 진행하기도 했었습니다. 현재 묘소가 있는 현대공원이 제가 사는 곳 근처라 요즘도 매년 가능하면 묘소 참배를 가곤 합니다.


인민혁명당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人民革命黨 事件) 또는 인혁당 사건(人革黨 事件)은 중앙정보부의 조작에 의해 사회주의 성향이 있는 도예종 등의 인물들이 기소되어 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날조사건이다. 1964년의 제1차 사건에서는 반공법1974년의 제2차 사건에서는 국가보안법·대통령 긴급조치 4호 위반 등에 따라 기소되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이 사형을 선고해,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인혁당 사건은 국가가 법으로 무고한 국민을 죽인 사법 살인 사건이자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일어난 인권 탄압의 사례로서 알려져 있다.

2005년 12월 27일 재판부는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소를 받아들였다.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는 피고인 8명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같은 해 8월 21일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의 소에서 서울 지방법원은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고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의 항변을 배척하면서 시국사건상 최대의 배상액수 637억여 원(원금 245여억 원+이자 392여억 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1] .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된 여덟 명은 다음과 같다.

  • 서도원(徐道源, 당시52. 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 김용원(金鏞元, 당시39. 경기여고 교사)
  • 이수병(李銖秉, 당시38. 일어학원 강사)
  • 우홍선(禹洪善, 당시45. 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
  • 송상진(宋相振, 당시46. 양봉업)
  • 여정남(呂正男, 당시30. 전 경북대 학생회장)
  • 하재완(河在完, 당시43. 건축업)
  • 도예종(都禮種, 당시50. 삼화토건 회장)


-위키백과사전-



올해로 벌써 35주기입니다. 8분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1975년 이후 수많은 이들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싸웠고 그로인해 고통을 당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최근 몇년전이 되서야 재심을 거쳐 배상까지 진행되 고인들의 명예는 회복이 되었지만, 그 아픔과 고통, 억울함은 재심과 보상으로 다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35년전 고인들과 함께 군사독재에 맞섰던 청년들이 이젠 지긋한 어르신들이 되셨습니다. 떠난이들을 기억하며 제사상을 준비하고 차례를 지냈습니다. 


아마도 35년전 그 시절을 떠올리시나 봅니다. 어느새 세월은 흘렀고, 청년은 백발이 되었습니다. 


이날 참배엔 선후배 동료들과 가족들이 함께 하셨습니다. 희생자 중 한분의 부인분도 오셨습니다. 진상이 규명될때까지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고 합니다. 사실 7~8년전까지만해도 희생자들을 기리고 추모하는 것도 쉽지 않았었습니다. 아직도 서슬퍼런 국가보안법이 이분들의 희생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묘비뒤에 새겨진 글귀가 보입니다. 군부독재와 싸우다 희생당하신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분들이 살아계신다면 지금의 사회와 권력, 정부에 대해 뭐라고 하실런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각기 태어난 날은 다르지만 묘비마다 새겨진 세상을 떠난 날은 모두 같은 날입니다. 
바로 1975년 4월 9일입니다.


술잔을 따르고 참배를 했습니다. 돌아가신분들이 천천히 드실 수 있게 시간을 두고 세번에 걸쳐 잔을 올렸습니다. 


누군가 묘비앞에 꽃을 심어놓았습니다. 봄기운이 완연한 4월초, 조금씩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술잔하나, 국화꽃 한송이 떠난이들에게 남겨진 것이 많지 않습니다.


학창시절 이분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추모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추모비를 학교(경북대)교정에 세웠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당국은 이적표현물이라며 박정희 군부독재시절이 또다른 모습으로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때마다 또 많은 학생들이 싸우다 잡혀가기도 했었습니다. 

참석은 못했지만 소식을 들으니 경북대 교정안에 8분중 한분인 여정남 선배님을 추모하는 공원이 조성됐다고 합니다. 이틀전 4월10일 제막식을 했는데요. 후배들이 이 역사를 늘 느끼고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대구 현대공원에는 8분 중 4분의 묘가 위에 보시듯 모셔져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말도안되는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할텐데요. 지금의 MB정부를 보면 역사가 거꾸로 가기도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4월의 하늘은 몹시도 아름답습니다. 잔인하게 말이죠. 


 ☜ 제 글을 편하게 보시고 싶으신분은 여기를 눌러 구독해주세요
더불어 글에 공감하셨다면 아래 손등모양 꾹 눌러서 추천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