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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민주화 됐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안되지만 한때 대통령 선거조차 체육관에 모여서 짜고치는 고스톱으로 뽑던 시절이 있었으니 많이 변하긴 변한거겠죠. 그러고 보니 내일이 5월18일 이군요. 광주항쟁이 벌써 31주기가 됐습니다. 31년전 오늘, 광주의 거리에서는 군인과 시민들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싸웠지만 이젠 역사책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가 됐습니다.


물론 이런 우리사회의 변화들이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별 것 아니게 보이는 하나하나를 이루어 내고 되찾아 오기 위해 수천, 수만명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향유하는 지금의 시대는 이들의 피로 만들어진 처절한 역사의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정작 2011년 오늘의 현실을 좀더 자세히 보면 지난 역사를 통해 이루어낸 민주주의란 것이 어쩐지 허전하기만 합니다. 대통령은 물론 이거니와 시장, 구청장, 동네 의원까지 직접 뽑게 됐지만, 적어도 맞아 죽거나 총맞아 죽을 걱정이 없게 됐지만 뭔가...뭔가가 허전합니다. 


바로 우리 삶이 제자리 걸음 이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같은 일을 하면서도 월급은 반밖에 못받는 비정규직이 양산되더니 물가가 10배나 뛸 동안 실질임금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습니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떠난지 3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노동조합 한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쫒겨나는 노동자들이 즐비합니다. 20대 80이라는 말이 등장한게 얼마되지 않았는데 벌써 현실은 1:99를 향해 달려갑니다.

빚더미에 앉은 농민, 등록금을 마련못하는 대학생, 직장을 구하지 못한 가장, 병원비 걱정에 시름하는 엄마, 생활고에 허덕이던 노인....결국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자살률 1위, 34분의 1명 꼴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민중의 벗, 영원한 청년 정광훈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는 건 아닌지, 이렇듯 우리 삶은 팍팍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피흘려가며 '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위해 싸웠던 이들이 있었듯, 늘 '민'이 삶에서도 주인답게 살아야 한다며 끊임없이 연대하고 싸워야 한다며 여전히 거리를 지켰던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87년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도 하고 군부독재도 끝났으니 이제 되지 않았냐며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을 찾아 갈때도 아직 멀었다며, 노동자, 농민, 서민이 대접 받는 세상은 아직 멀었다며 거리를 지켰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은 늘 뭉쳐야 한다고, 모두가 함께 나서면 된다고 언제나 어디에나 '민'의 현장에서 살아있던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늘 그 연대의 대열 맨앞에서 호탕한 웃음으로 사람들에게 힘과 기운을 북돋아 주셨던 큰 어르신 한분이 떠나셨습니다. 일흔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활동력으로 후배 운동가들에게 오히려 힘을 주셨던 정광훈 의장님. 


농민출신이었지만 노동자든, 농민이든, 학생이든 늘 연대가 필요한 곳이라면 앞장서서 달려갔던 그였습니다. 누구나 웃음짓게하는 특유의 입담과 늘 청년처럼 활기차고 밝았던 표정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그를 아는 누구나 그 웃음으로 그를 기억합니다.

그렇게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청년으로 살았던 그가 이제는 정말 제대로 쉬려합니다. 70평생을 아스팔트위에서 농사지으며 전국을 누비면서도 쉴줄 몰랐던 그가 이제는 쉬려합니다. 영정에서조차 여전히 그 호탕한 웃음 가득한데, 병환도 아닌 갑작스런 사고로 떠나는 모습이 너무나 허망하기만 하지만 이제는 보내드려야겠습니다.



민중의 벗으로 영원한 청년으로 언제나 기억하겠습니다. 
늘 말씀하셨던 ‘미래’, ‘꿈’, ‘행복’, ‘축제’...혁명과 운동을 기억하겠습니다.

마음속 깊이 존경과 사랑을 담아 정광훈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故 정광훈 의장 약력




1939년 9월 13일 해남군 옥천면 송운리 출생

1952년 옥천초등학교 졸업

1955년 해남중학교 졸업

1958년 목포공업고등학교 졸업

1966년 12월 최해옥 여사와 결혼


1970년 해남 YMCA 신협 설립 발기인/해남읍 교회 신협 설립 발기인/해남읍교회 중고등부 교사

1972년 해남 YMCA 농어촌 위원장

1977년 故 김남주, 황석영등과 농민운동 조직화에 나섬

1978년 전남기독교 농민회 총무
1980년 5.18당시 전남기독교농민회 총무로 무안, 해남, 영암, 강진 시위주도

1981년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교육부장

1982년 해남 기독교 농민회 면 협의회 건설 주도

1984년 민중교육연구소 교육부장, 미국농산물 수입 저지 미국대사관 점거 투쟁

1989년 전국농민운동연합 부의장/전국수세대책위 교육 선전활동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연맹 초대의장

1991년 민주주의 민족통일 광주전남연합 상임의장

1992년 농민대회 주도 수배 중 구속, 4년간 수감생활(1996년 만기 출소)

1998년 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연맹 의장

1999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2001년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의장

2002년 전국농민대회 관련 투옥 

2003년 전국민중연대 공동대표/WTO 칸쿤회의 반대 한국투쟁단 대표

2005년 APEC반대 국민행동 대표/WTO 반대 홍콩민중투쟁단 대표/ 
          고 전용철, 홍덕표 농민 사망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공동대표

2006년 한미FTA저지 미국원정투쟁단 단장/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 

2007년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2007년 한미FTA저지 투쟁관련 3차 투옥 

2009년 한국진보연대 고문

2010년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2011년 민주노동당 고문/전국농민회총연맹 고문/전농 20년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2011년 4월 26일 4.27 화순군수 보궐선거 지원유세 후 해남으로 이동 중 교통사고

2011년 5월 13일 오후 8시 51분 조선대학교 병원에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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