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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서글픈 사실이지만, 학창시절 국사과목을 떠올려 보면 아마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저 외우고 외우고 또 외웠던 기억이 한가득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은 어떨른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만해도 국사는 대표적 암기과목이었고 그렇게 외우다 지칠때쯤 시험을 치르고 교실을 나서자마자 잊어버리고 마는 일회용 지식을 가르치는 과목으로 전락했었습니다. 

그렇게 스치듯 배우는 지식들 사이에 그래도 유난히 기억나는 한장의 사진(그림인지도...)이 있는데, 바로 전봉준의 모습입니다. 상투를 틀어올렸지만 웬지 정돈되지 않은 이미지에 부릅뜬 눈, 굵게 다문 입술.... 언뜻 보면 무재랭이 농부같기도 하지만 역사속 '동학'과 함께 결부되어 마치 도적떼의 수괴 같은 이미지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그저 암기의 대상이었던 역사속 수많은 '난' 가운데 하나를 주도하다가 목이 베인, 말그대로 폭도들의 두목 정도 이미지 말입니다. 

이후 대학시절 동학에 관한 여러가지 자료를 접하면서 시각이 많이 달라지기도 했고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동학자체가 재평가 되면서 동학의 난이라 불리던 역사책속 서술이 갑오농민전쟁 혹은 갑오농민혁명이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자연스레 전봉준에게는 장군(녹두장군)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리게 됐습니다. 

하지만 정작 전봉준이라는 한 인간, 혁명을 위해 인생을 건 한 운동가로서의 모습은 최근까지도 거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전봉준의 인생을 보면 생을 다하기전 빛났던 몇 년을 위해 앞선 인생 전체를 준비하며 살아온 느낌이었습니다. 40년이라는 시간을 1894년이라는 한 해를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습니다. 

어린시절 그는 핍박받던 농민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삶을 피부로 느끼며 성장합니다. 그러던 중 농민들의 권리를 주장하다가 동네 양반지주에게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는 과정까지 겪게 됩니다. 농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나서던 아버지가 죽게 되면서 전봉준의 삶에 적지 않은 변화가 생깁니다. 

하지만 전봉준은 농민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스스로 농민으로만 살지 않으리라 결심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농민이 아닌 농민을 위해 살아가는 지식인으로, 선비로 살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전국 각지의 수많은 뜻있는 이들을 차근차근 만나가며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해갔던 것입니다. 말그대로 그는 준비된 혁명가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 자신도 1894년이라는 시간을 바라보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늘 끊임없지 동지를 찾고 이상향을 고민하며 세상에 대한 꿈을 꾸었으며, 그 꿈을 이룰 시기가 언젠가 올 것이라 믿고 준비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정부와 외세에 의해 패배하고 말았지만 갑오농민혁명은 우리 역사속에서 보기 드물게 이땅의 '민'들의 힘으로 권력을 굴복시키고 그 힘을 통해 스스로 권력을 행사하는 경험을 하는 등 아직도 좀더 조명이 필요한 중요한 역사입니다.
가장 뜨거웠던 1894년의 정점에서 전봉준은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았고 그와 동시에 농민전쟁도 일단락 되고 말았지만, 죽음을 대하던 그의 의연한 모습과 세상을 향한 꿈은 지금도 여전히 녹두장군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오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얼마전 100만 민란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들이 갑오년 최후의 전장이었던 우금치에 모였습니다. (세세한 정치적인 이야기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게 사실이라, 이는 기회되면 이야기해보기로 하는데요. 다만) 우리가 사는 이 시간, 이 시대에 다시금 전봉준이 꾸었던 꿈을 꾸는 이들이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싶긴합니다. 
촛불이 보여줬던 그 힘으로 언젠가 정말 평범한 '민'들이 주인답게 사는 그런 날을 꿈꾸며, 우리도 우리의 1894년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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