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제주도 여행기 #3 제주 4.3 평화 기념관

제주도 여행기 세번째 편입니다. 예상대로 4.3관련 무거운 내용이 많아 연이은 포스팅들이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만 ^^. 조금이라도 제주도의 오늘을 이루고 있는 한 부분임에 틀림 없는 만큼 더 많이 알려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오늘도 4.3관련 이야기인데요. 아마 다음편 부터는 즐거운 이야기도 많아 질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제주도 여행기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관련포스팅>
2010/06/21 - 제주도 여행기 #1 너븐숭이 4.3 유적지
2010/06/25 - 제주도 여행기 #2 제주 4.3 평화공원


지난번 포스팅을 통해 제주도 4.3 평화공원을 소개해드렸는데요. 오늘은 이어서 공원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제주4.3평화기념관'을 소개할까 합니다. 기념관은 평화공원 입구쪽에 위치하고 있는데요. 한눈에도 독특한 형태의 건물내부에 각종 전시물들이 4.3사건을 잘 배울 수 있도록 깔끔하게 정리되 있습니다.


공원을 둘러보고 기념관으로 향하는 모습입니다. 마치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건물 상단이 독특합니다. 공원 전체적으로 그렇지만 미관에 상당히 공을 들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딱딱한 직사각형 건물보다는 훨씬 좋더군요.


기념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시실에 들어서서 처음 만나는 조형물입니다. 언 뜻 보기에 관처럼 보이는데요. 사진을 클릭하면 문구가 보입니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도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백비,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명예회복과 보상 등이 이루어 지긴 했지만 여전히 남은 과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누워있는 거대한 돌 비석이 제대로 이름 지어져 세워질 날이 꼭 왔으면 싶습니다.


돌 비석 위로는 천장과 뚫린 터널을 통해 바로 햇볕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을 만든 분들이 참 대단하구나 싶더군요. 돌비석을 비추는 햇볕이 바로 우리 역사의 현재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전시실은 수많은 안내판과 각종 소품과 4.3 당시의 여러가지 자료들이 함께 정리되 있었습니다. 안내코스를 따라가면서 설명을 들으니 당시의 시대상과 사건의 정황을 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48년을 전후한 인민위원회 결성 등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잘 설명돼있습니다.


해방 직후 였던 당시에 학생들을 가르치던 학교 교실의 모습입니다. 전시실에는 이렇게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소품들도 많았습니다.
잠시 앉아보고도 싶었지만 의자가 좀 작더군요..ㅡㅡ;.


4.3의 발단이 된 당시 3월1일 있었던 발포사건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사건으로 6명의 주민이 경찰의 총에 사망하면서 비극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3월1일 있었던 발포사건이 합법적인 집회였음을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합법집회에 경찰이 발포를 해 무고한 주민들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증거입니다.


당시 목숨을 잃은 6명의 이름입니다. 뒤 이어질 엄청난 죽음의 행렬이 여기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전시실을 따라 들어가다보니 이렇게 당시의 감옥(유치장)이 재현돼있더군요. 3.3편의 좁은 유치장에 35명이 앉지도 못할만큼 빽빽하게 수감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조금만 반정부적 집회와 시위를 하면 검거했다고 하니 늘 만원이었나 봅니다.
최근 집시법을 개정한다는 국회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결국 싫은 소리는 듣지 않고 잡아넣겠다는 이야기니 비슷한 것 같습니다.


당시 유치장 재현 모형입니다. ^^. 꼼꼼히 정성스레 만들어서 실감이 날 수 있게 신경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사용된 총기류입니다. 조악해 보이지만 이 총들이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음을 깨달으면 참 무섭기도 합니다.


4.3사건의 도화선이 된 오라리 방화사건에 대한 설명입니다. 당시 우익청년단이 한 마을에 불을 질러놓고 이를 폭도들의 소행이라고 덮어쒸우며 3.1 발포 사건에 대한 평화협상이 진행되던 과정에 찬물을 끼얹게 됩니다. 미군정 또한 이를 빌미로 공격적인 입장으로 바뀌게 됩니다.


오라리 사건이후 주민들을 소개시키는 모습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 설치물입니다. 미군정은 오라리사건이후 강경진압 방침을 세우고 제주도 전 주민들을 강제로 해변과 가까운 동네로 모두 거처를 옮기도록 합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한 그 외 지역을 초토화 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뒤에도 다시 몇차례 언급이 됐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제주도민들 모두를 죽여도 된다 했을 만큼 4.3사건의 진정한 주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이 직접 지시해 제주도에 경찰서를 추가로 두곳 신설하라는 내용의 문서자료입니다.

 
 
검은색 바탕에 붉은 글씨가 참 섬뜩해 보이는데요. 당시 제주도 상황이 정말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더군요.


전시관 한쪽벽에 전시되있는 부조들인데요. 당시 무참히 살해된 제주도민의 참혹한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4.3항쟁의 전 기간에 있었던 수많은 학살 현장 중에서도 가장 가슴아픈 곳이 바로 다랑쉬 굴입니다. 토벌대를 피해 한 동굴에 숨어든 수많은 피난민들이 안에 있었음에도 잔인하게도 입구에 불을 피워 모두들 몰살시킨 사건인데요. 토벌대의 잔혹한 초토화 작전의 상징적인 사건이 됐습니다. 당시 동굴속에는 주로 부녀자들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심지어 9살난 어린이도 포함되 있었다고 합니다.


사건이 있은 40년이 지나고 나서야 발견된 다랑쉬 동굴을 복원해 놓은 전시실입니다. 구석구석에 피난민들이 이용하던 각종 주방 집기 등이 보입니다.

처음 발견된 후 더 문제가 된 것은 당국이 발굴된 유해를 서둘러 화장해버린 것입니다. 제대로 조사도 다 마치지 못한 상황에서 애써 사건을 은폐 시킨 것 입니다. 역시 역사는 제 실상을 그리 쉽게 보여주기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4.3제주항쟁의 결과 대략 3만명의 주민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이는 당시 제주인구의 1/9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정말 엄청난 대량 학살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겠습니다. 게다가 그중 1/3은 노약자와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4.3이후 50년이 넘은 지난 2000년이 되어서야 김대중 정부에 의해 진상규명법안이 통과 되어 발효 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학살극이 제대로 조사되기 까지 반세기가 흘렀네요.


전시장의 문구처럼 제주4.3항쟁은 진실이라는 힘을 통해 앞으로도 후대들에게 희망을 만들어주는 귀감이 될 것입니다. 평화와 통일 그리고 인권의 상징인 4.3사건이 역사속에서 늘 우리에게 큰 힘이었듯이 말이죠.


기념관을 다녀간 분들이 남긴 다양한 메모들입니다. 기념관에 와서야 제대로 실상을 알게 됐다는 흔적이 많더군요.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돌 비석처럼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과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제주도에는 참 여러 관광명소가 많습니다만 한번쯤은 이렇게 우리의 역사를 생생히 느껴보는 [제주 4.3평화 기념관] 방문 어떠신가요. 마음은 조금 무거울지 몰라도 여러분의 제주도 여행이 더욱 알차고 의미있어 질 것이라 약속드립니다.



 ☜ 제 글을 편하게 보시고 싶으신분은 여기를 눌러 구독해주세요